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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드,백두산에서 광복절을 기리며 대한민국을 생각2024년 8월11일~18일하얼빈, 두만강, 훈춘, 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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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lroy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4-08-30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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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부산고구려$ 제국과 일본열도 사이에 철기와 토기의 교류 및 제작기술의 전래, 가야토기와 일본 수혜기의 관계,제철기술과 토기 제조기술이 연관되어 있음, 임나일본부라는 용어와 6세기 왜와 가야의 관계 ​3세기 중엽 무렵에 긴키(近畿)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호족연합정권으로 성립한 야마토 정권(大和政權)은 일본열도 내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규슈 북부지역을 통하여 선진기술을 가진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려 하였다. 그 결과 5세기에는 한반도 및 중국 남조(南朝)와의 교섭을 통하여 대륙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특히, 가야지역에서 생산된 철 및 이를 가공하는 제철기술, 그리고 제철기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토기 제작기술로 만들어진 가야의 도질토기가 일본지역에 전해져 철기와 수혜기(須惠器)의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3세기경부터 일본열도는 가야지역에서 생산되는 철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주로 철정의 형태로 일본열도에 전해진 철기 소재를 바탕으로 철기를 제작하기도 하였으며, 철검과 같은 무기나 갑옷 투구와 같은 무구는 처음에 가야지역 등에서 제작된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일본열도 자체에서 직접 철을 제련할 수 있게 된 5세기 말 내지 6세기초까지는 철 자원을 가야지역에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가야지역의 도질토기 기형과 제작기술 역시 일본열도에 전해졌다. 이들 토기는 규격화된 크기와 모양을 가지고 있었으며, 물레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서로 연관되어 있는 철기와 토기를 만드는 기술이 전해짐으로써, 일본열도에는 소국을 통합한 국가권력이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이 성립하였다.이처럼 왜가 가야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목적은 가야지역이 철을 중심으로 하는 선진문물의 수입원으로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일본에서 본격적인 제철이 시작되는 6세기 이전까지 가야는 일본의 중요한 철의 부산고구려$ 수입원이었다. 즉, 왜가 가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이해관계의 실체는 철을 중심으로 하는 선진문물의 수입원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540년대 이후 백제의 끊임없는 선진문물 공세로 왜는 백제를 통해서 선진문물을 흡수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이로 보아 왜의 한반도 제국들과의 외교관계는 선진문물의 수용을 위한 것이었으며, 가야와의 관계도 이러한 목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제철기술 철기사용 - 청동기에 비하여 강도가 높고 각종 물품을 제작하기에 좋은 특성을 지닌 철기를 사용함으로써 농업이 획기적 발전 , 무력 증대가 가능해졌다다제철기술 및 철기제조의 수준은 고대사회의 경제력 · 군사력을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철의 전래와 가라국 - 김해의 구야국은 중국 한반도 서북 및 남해안 ,일본열도를 잇는 교통상의 요충지 ,금관가야 金官加倻 는 ‘쇠를 관장하던 나라’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철의 교역은 5 세기 말에서 6 세기 초까지 지속 철정 (鐵鋌) - 가야지역 등에서 일본열도로 유입된 것으로 생각되는 구체적인 물품일본서기 4 세기 중반 백제의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철정 40 매를 보낸 기사가 있다철정은 일종의 철 소재이며 이것을 가공하여 각종의 철기류를 만들 수 있었다. 철정은 한반도에서는 경주 지역을 비롯하여 남부지역에서 출토되며 , 일본 열도에서는 북부 규슈에서 세토나이카이를 거쳐 나라 분지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 특히 가야지역에서는 김해의 대성동 유적 ,부산의 복천동 유적에서 많은 철정이 출토되었는데 부장품으로서의 기능만이 아니라 화폐 및 중간 철 소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3세기경부터 일본열도는 가야지역에서 생산되는 철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주로 철정의 부산고구려$ 형태로 일본열도에 전해진 철기 소재를 바탕으로 철기를 제작하기도 하였으며, 철검과 같은 무기나 갑옷 투구와 같은 무구는 처음에 가야지역 등에서 제작된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일본열도 자체에서 직접 철을 제련할 수 있게 된 5세기 말 내지 6세기초까지는 철 자원을 가야지역에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가야지역의 도질토기 기형과 제작기술 역시 일본열도에 전해졌다. 이들 토기는 규격화된 크기와 모양을 가지고 있었으며, 물레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서로 연관되어 있는 철기와 토기를 만드는 기술이 전해짐으로써, 일본열도에는 소국을 통합한 국가권력이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이 성립하였다. 이처럼 왜가 가야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목적은 가야지역이 철을 중심으로 하는 선진문물의 수입원으로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일본에서 본격적인 제철이 시작되는 6세기 이전까지 가야는 일본의 중요한 철의 수입원이었다. 즉, 왜가 가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이해관계의 실체는 철을 중심으로 하는 선진문물의 수입원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540년대 이후 백제의 끊임없는 선진문물 공세로 왜는 백제를 통해서 선진문물을 흡수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이로 보아 왜의 한반도 제국들과의 외교관계는 선진문물의 수용을 위한 것이었으며, 가야와의 관계도 이러한 목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문제 - ‘교역기관설 ’과 ‘외교 기관설가야제국이 백제 · 신라의 침입을 저지하려는 외교적인 노력의 산물(1) 왜의 다섯 왕(倭의 五王)중국 사서에 보이는 야마타이 국의 여왕인 히미코(卑彌呼)의 뒤를 이은 이요가 중국의 진(晋)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 266년. 그 이후 단절되었던 왜국에 관한 기사가 또 다시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한 부산고구려$ 것은 1세기가 지난 뒤였다. 413년에 왜국이 조공을 바쳐왔다고 하는 기록이 있고 또 421년부터 502년에 걸쳐서 왜의 다섯 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나 중국 왕조로부터의 책봉, 칭호 수여에 관한 기록이 이어진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南北朝)라고 하는 대립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강남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남조(南朝)는 동진(東晋)․ 송(宋)․ 제(齊)․ 양(梁)으로 이어져 마지막 왕조인 진(陳)이 6세기말에 북조(北朝)에서 나온 수나라에 의해 병합되게 되는데, 왜국왕은 이들 남조의 여러 왕조에 사신을 보내어 책봉을 받은 것이었다. 다섯 명의 왕의 이름은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이들이 어느 천황에 해당되는가에 대하여 예전부터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다. 이 중에 마지막 왕인 무(武)가 실명인 ‘오오하쓰세노와카다케’로 일본서기에는 ‘大泊瀨幼武’,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나온 철검에 ‘와카다케루 대왕’, 구마모토 현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나온 철검에 ‘와□□□루 대왕’이라고 기록된 ‘웅략천황(雄略天皇)’을 가리키는 것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일본 열도의 여러 지역에 지배를 확대시키고 있었던 그들이 그 세력을 굳히고 나아가 여러 왕권이 서로 경쟁하는 동이(東夷: 동쪽에 위치한 오랑캐) 세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하여 중국황제로부터 칭호를 받았다. 예를 들면 478년에 무가 송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칭호는 다음과 같다. 使持節, 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명치 시대 이후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칭호가 당시 한반도에서의 왜국의 우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강조되어왔다. 특히 칠지도(七支刀)에 새겨진 명문이나 광개토대왕의 비문과 더불어 ‘임나일본부’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절대적인 증거로 생각되어졌다.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이 칭호 중에 ‘使持節’‘都督․ ․ ․諸軍事’라고 하는 부산고구려$ 것은 군사지배권에 관한 것이다. 군령 위반자에 대한 처벌과 관계있는 ‘使持節’은 使持節․ 持節․ 仮節 이라고 하는 삼 등급 중에 최상급으로 황제의 군사대권의 위임에 관한 ‘都督’도 都督․ 督․ 監의 3 단계의 랭크 중에 최고 높은 지위에 해당한다. 이 군사지배권이 미치는 범위 중에 신라나 가야․ 가라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이 문제가 된다. 진한(秦韓)이라고 하는 것은 진한(辰韓), 모한(慕韓)은 마한(馬韓)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라나 백제에 의해 통일된 지역의 예전 명칭까지 기록하였든지 내지는 그들 지역 중에 아직 통합되지 않았던 부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 것이다. 신라는 차치하고서라도 임나의 군사지배를 인정한 칭호는 바로 왜국에 의한 임나 지배를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중국의 왕조가 각지의 왕에게 하사한 군사지배권의 칭호를 검토한 연구에 의하면 칭호에 기록된 지역명은 반드시 실제로 군사지배가 행하여졌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都督河西諸軍事’라고 하는 칭호를 보더라도 423년부터 444년에 걸쳐서 河西王에게 주어진 것인데 동시에 432년부터 502년에 吐谷渾王에게도 주어져 있으며 나아가 476년부터 505년 사이에 탕창왕(宕昌王)에게도 인정되었다. 같은 시기에 여러 명에게 하서(河西)의 군사지배권을 인정한 것이 되는 것이다. 칭호는 기본적으로 신청한 사람의 희망대로 주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신라나 임나 등의 군사지배권이 인정되었다고 해서 실제로 왜국왕의 세력이 이들 지역에 미치고 있었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실제로 이 당시 왜왕 무는 백제도 포함한 七國諸軍事라고 하는 관직을 신청하고 있었지만 송 왕조는 백제를 제외한 六國諸軍事라는 칭호만 인정하였다. 이 점을 오히려 주목해야 한다. 장군 부산고구려$ 칭호에 대하여도 무는 송나라로부터 ‘安東大將軍’을 인정받았다. 그 뒤 479년에 제나라로부터 鎭東大將軍, 502년에 征東將軍을 받은 것은 실제로 사신을 파견한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성립을 기념해 축하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하는 데 분명히 安東 - 鎭東 - 征東과 같이 왜왕은 장군 칭호의 랭크를 상승시켜갔다. ​그러나 이 시기에 중국왕조와 교섭을 하지 않았던 신라는 차치하고서라도 백제왕이나 고구려왕의 장군 칭호와 비교한다면 어떨까?왜왕이 479년에 받은 鎭東大將軍을 백제왕은 이미 420년에 받았으며 왜왕이 征東將軍이 된 502년에 백제왕에게는 征東大將軍이 주어졌다. 고구려의 경우는 남북 양조에 조공을 바쳤는데 남조로부터 받은 칭호를 보면 정동장군은 이미 413년, 정동대장군은 416년부터 받고 있고 그 뒤는 차기대장군(車騎大將軍)에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지위가 상승하고 있다. 장군 칭호에서 보이는 왜왕의 평가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한다면 항상 가장 낮은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기사년(己巳年)의 사실 칠지도 명문이나 광개토대왕 비문에 이어서 왜의 다섯 왕의 칭호도 한반도에 있어서의 왜국의 패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단 군사지배권에 관한 칭호의 요청은 임나 지배에 대한 왜국의 일관된 지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여러 국가에 대하여 우위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는 일본 고대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이었다. 4세기 후반에는 야마토 조정이 조선에 진출하여 남부지방을 직접 지배 하에 두었는데 그 지배를 위해 설치한 기관이 임나일본부이고, 562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200년 동안에 걸쳐 존속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산고구려$ 일본부에 관한 기술은 일본서기에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할 사료로 생각되어진 것이 칠지도나 광개토대왕비, 왜의 다섯 왕의 칭호였던 것이다. 『임나흥망사』(1949년)라는 책에서 일본의 연구자 末松保和가 주장한 대로, “일본서기의 연구는 바로 임나 역사의 재료의 연구였다”고 할 수 있다. 8세기 초에 완성되는 일본서기는 야마토 조정에 의한 통치의 정당성을 목적으로 한 책이었다. 그 목적과 관련되어 한반도의 여러 국가들이 원래 번국으로 일본에 복속해야 한다고 하는 것, 천황이 한반도의 여러 국가를 속국으로 거느리고 있었던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 주요한 테마의 하나였다. 4세기 후반에 있어서 한반도 여러 국가와의 교섭의 시작을, 일본에 대한 복속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삼고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사적(史蹟)으로 묘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신공황후의 섭정(攝政) 원년을 서기 201년에 해당하는 해로 설정한 것은 일부러 『魏志倭人傳』의 한 절을 주기하여 히미코와 동일인물인 것처럼 보여 실재성을 인상짓고자 한 것일 것이다. 그 때문에 4세기 후반의 사건이 간지 二運(120년) 거슬러 올라간 3세기 전반의 신공 연간의 일로 기록되게 된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가 서기 375년에 해당하는 을해년으로 삼고 있는 백제의 근초고왕 즉위가 일본서기에서는 二運 거슬러 올라간 같은 을해년, 즉 서기 255년에 해당하는 신공55년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신공황후의 49(기사년), 즉 이운 거슬러 올라가면 서기 369년의 기술이 실질적으로 조선을 복속시킨 시원(始源)을 보여주는 기사가 되어있다. 이 해 신공황후는 荒田別을 장군으로 삼아 출병, 백제의 장군 木羅斤資 등과 더불어 신라를 정벌, 임나 七國을 평정하고 나아가 서방 지역을 정복하여 백제에게 주고 부산고구려$ 백제왕의 복속을 맹세케 하였다고 한다. 末松保和는 과연 견실한 실증사가답게 철저한 사료비판을 행하여 즉위 당초의 삼한 정벌 등에 대하여는 허구라고 지적하면서, 이 기사년의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는 입장에서 획기적인 출병에 의한 七國 평정을 임나 지배, 임나일본부 설치의 출발점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임나 七國 평정은 기사년의 기사 중에서도 특히 구체성이 부족, 당돌한 인상을 지을 수 없다. 더욱이 그것이 무언가 사실의 반영이라 하더라도 잘 읽으면 木羅斤資의 작전에 의한 것으로 오히려 진상은 백제 주체의 사건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삼국사기의 475년의 기사에 나오는 木劦滿致가 『일본서기』에서는 木羅斤資가 신라를 공격하였을 때의 신라의 여성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쓰여 있어서 연령적으로 보아도 모순이다.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일련의 기사를 369년부터 一運(60년) 거슬러 올라간 기사년, 즉 429년의 사건이라고 하는 山尾幸久의 견해도 있다. 어쨌든 『일본서기』의 기사는 처음에 해당하는 己巳年의 단계에 이미 임나 전역의 지배가 확립되었던 것과 같은 묘사법을 쓰고 있다. 따라서 임나일본부의 역사는 오로지 562년의 멸망으로 향하는 역사가 되어 末松保和도 “임나 여러 나라의 역사는 쇠퇴 일로의 경과를 거쳐서 임나일본부도 부패의 정치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 대략 150년의 역사는 퇴보를 향한 점차적인 행진이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야제국 #일본열도 #호족연합정권_야마토정권大和政權 #철기와_토기의_교류 #수혜기須惠器#철정鐵鋌 #일본서기 #4세기중반_백제의_근초고왕이_왜왕에게_철정40매를_보낸_기사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倭의_五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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