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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idia
댓글 0건 조회 8회 작성일 24-10-0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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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부산고구려$ 세일러 동판화 29 cm x 21 cm 1956 년- 1960년 사이​빌리 세일러 동판화 29 cm x 21 cm 1956 년- 1960년 사이​​~~~~~~~~~~~~~~~~~~~~~~~~~~~~~~~~~~~~~~~~~~~~~~~~~~~~~~~~~​빌리 세일러 [Willy Seiler, 1903~1988]​​​빌리 세일러​빌리 세일러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1903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후 뮌헨에서 미술공부 했다. 1928년 독일을 떠나 파리에서 2년을 더 공부한 후 45개국을 떠돌며 그림도 그리고, 전시회도 하던 역마살 가득했던 화가였기에 그의 정확한 사망년도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2차대전 종전 후부터 20여년 일본에 거주하면서 주일미군사령부에 근무하였고, 1956년부터 1960년 6월까지 3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약 12점의 한국소재 동판화를 남겼다. (발췌)​/한겨레 2006.11.08 14:40​​​윌리 세일러 (Willy Seiler, 1903~ ?)​윌리 세일러는 1903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후 뮌헨에서 미술공부 했다. 1928년 독일을 떠나 파리에서 2년을 더 공부한 후 45개국을 떠돌며 그림도 그리고, 전시회도 하던 역마살 가득했던 화가였기에 그의 정확한 사망년도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그는 2차 대전 종전 후 부터 20여 년 일본에 거주하면서 주일미군사령부에 근무하였고, 1956년부터 1960년 6월까지 3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13점의 한국소재 동판화를 남겼다.​윌리 세일러의 '한국시리즈'에는 재래시장 풍경 뿐 아니라, 한강변에서 낚시를 하면 생계를 유지하던 '낚시꾼 부산고구려$ 할아버지''마을 이장''할머니''농부''어린이''시골 학생들''한복 입은 미인'등이 있다. 그의 한국 소재 작품 몇 점은 아이젠하워 당시 미대통령이 구입해서 소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Seiler, Willy (1903 - 1988 )​Willy Seiler was a German printmaker known for his hand-colored etchings of life in rural Japan. Born in Dresden, Seiler set off from Germany in 1928 to travel the world. Following World War II, he settled in Karuizawa, Japan. There he produced etchings and paintings of Japanese life. Willy Seiler found an eager audience for his work in American occupation force and served as an art instructor at the American Army College in Tokyo.​/Willy Seiler Art | Hand-Colored Etchings | Ronin Gallery (2024.9.29)​​​Willy Seiler​1903 - 1988?Willy Seiler was a German printmaker known for his hand-colored etchings of life in rural Japan. He was born in Dresden, Germany, where he studied art. Later, he continued his art studies in Munich. Seiler left Germany in 1928, apparently for good, and traveled the world. After World War II ended, he settled in Karuizawa, Japan 부산고구려$ and produced etchings and paintings of Japanese life. Seiler’s works were intended for non-Japanese people, primarily members of the American occupation force or Westerners in Japan. Otherwise, he would have been compelled to execute his work using the traditional Japanese woodblock technique and had to cooperate with a Japanese publisher for the complicated carving and printing process, as was done by most of Seiler’s Western artist contemporaries in Japan, such as Paul Jacoulet. Willy Seiler’s prints depicted picturesque scenes of Japanese and Korean landscapes and people that reflected Western people’s perceptions of Asia. ​Willy Seiler's ArtworksStarting Life 1950s Etching 21 x 28.6 cmRelaxing 1950s Etching 22 x 29 cmFisherman 1950s Etching 22.2 x 30.5 cmKorean Nobleman 1950s Etching 20 x 28.5 cmKorean Beauty 1950s Etching 21.9 x 29.5 cmHomeless 1950s Etching 28.5 x 20 cmShrewd Bartering 1950s Etching 31.8 x 19.3 cmHaggling 1950s Etching 38 x 31 cmReminiscenses 1950s Etching 44.5 x 36.8 cmGrowing Up 1950s Etching 28.5 x 21.5 cm/Willy Seiler | Old 부산고구려$ Korea (2024.9.29)​​​~~~~~~~~~~~~~~~~~~~~~~~~~~~~~~~~~~~~~~~~~~~~~~~~~~~~~~~~~​2006.11.8 - [필진] 밴댕이 장수를 그린 미국화가부분 ⓒ 이충렬남대문시장, 중부시장, 동대문시장, 평화시장, 경동시장, 부산 국제시장... 1950년부터 70년대까지 '명성'을 떨치던 재래시장의 이름이다. 이제는 백화점과 대형할인점에 상권을 빼앗기고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재래시장이지만, 6.25전쟁 이후 근 30여년 동안은 모든 국민이 이용할 정도로 우리나라 유통 경제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 당시 재래시장은 많은 서민들에게 장사터를 제공하였고, 그들은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성공과 좌절을 맛봤으니, 많은 사람들의 꿈과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런 50년대 말, 60년대 초반의 재래시장 모습을 동판화로 만든 미국인 화가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빌리 세일러(Willy Seiler)라는 화가다.​빌리 세일러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1903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후 뮌헨에서 미술공부 했다. 1928년 독일을 떠나 파리에서 2년을 더 공부한 후 45개국을 떠돌며 그림도 그리고, 전시회도 하던 역마살 가득했던 화가였기에 그의 정확한 사망년도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2차대전 종전 후부터 20여년 일본에 거주하면서 주일미군사령부에 근무하였고, 1956년부터 1960년 6월까지 3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약 12점의 한국소재 동판화를 남겼다. 위의 작품은 그의 12점 중의 한점으로, 시장에서 치열하게 장사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오른쪽 아주머니는 아기를 낳은지 얼마 안되었는지 부산고구려$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이 5-6남매는 보통이고 많으면 7-8 남매까지 있었으니, 여인네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으랴. 더우기 남자들에게 일자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아낙네들이 시장에서 좌판이라도 벌여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 이 아주머니는 저녁에 집에 돌아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위하여 가슴을 드러낸채 장사를 하면서도, 머리 속에는 집에 두고온 아기 생각으로 가득한 듯한 표정을 짓고있다.부분 ⓒ 이충렬아주머니가 파는 생선은, 디포리, 띠포리라고 부르는 멸치 종류다. 멸치는 행어, 정어리, 곤어리, 운어리 4종류의 이름을 공통으로 부르는 것인데, 디포리는 곤어리의 일종으로 은빛 색깔이 있다. 그런데 그림에도 은빛이 보이니 참으로 섬세한 묘사다. 그리고 '밴댕이 소갈딱지'의 밴댕이가 띠포리의 경상도 방언이니, 아주머니는 밴댕이를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다.띠포리는 멸치보다 냄새는 많이 나지만 국물이 진해 김치를 담그거나 김치찌게 국물 내는데 사용하는데, 그 옆 아주머니 역시 김치 재료를 팔고있다. 서로 옆에서 상부상조하며 힘들고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는 여인들의 지혜와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부분 ⓒ 이충렬이 아주머니의 함지박에 있는 야채는 쪽파로 보이는데, 그냥 밭에서 뽑은채로 파는게 아니라 쪽파뿌리를 다듬어서 갖고 나온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집에서 쪽파를 깔끔하게 다듬어야 조금이라도 더 팔고, 단골도 부산고구려$ 생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고, 그런 상인일 수록 악착같다는 소리를 들으며 돈을 모았으리라...부분 ⓒ 이충렬이빨 사이로 꽉 물은 돈 ! 정말 악착같이 돈을 벌려는 모습이다. 그때는 돈이 없으면 굶어 죽아야 하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서민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돈을 벌어야만 했다. 미국인 화가의 작품이지만, 매우 일찌기 우리나라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 '민중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화가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당시의 절박하고도 치열한 삶의 모습을 표현했다.빌리 세일러 채색동판화 21 x 29 cm 1956 - 1960년 사이 ⓒ 이충렬이 아주머니는 장사가 안되는지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당시의 사진이나 그림들을 보면 이렇게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 많은데, 그것은 삶이 피곤하고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더우기 당시 이승만 정권의 정치라는게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보다는 권력자들의 치부에 급급하고 정적을 제거하는데 골몰하지 않았던가. 그런 시대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던 아픔의 시대였기에, 여인네들의 삶은 더욱 고달플 수 밖에 없었다.빌리 세일러는 그런 우리나라를 3번 다녀가며 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표현한 작품을 남겼는데, 아래의 작품 역시 재래시장의 모습을 동판화로 제작한 작품이다.부분 ⓒ 이충렬아주머니가 파는 것은 소금이다. TV 연속극 고구려본기 부터 나올 정도로 오래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소금이 국가의 전매물이었을 정도로 부산고구려$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소금섬을 지고 다니며 소금을 팔던 소금장수는 1930년경에 대부분 사라지고, 5일장을 통해서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소금은 생필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식탁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5일장이나 재래시장에서 소금가게를 하던 사람들은 많은 부를 축적하는 부류에 속했다. 자본을 갖고 소금을 사들여 박리다매로 팔았기 때문에 영세상인들이 감히 경쟁을 하기 힘든 품목이었고, 소금장사들은 이런 독점적 위치를 이용해 폭리를 취하기도 하여 '소금값이 금값이다'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래서 소금가게 주인인듯 보이는 이 아주머니는 장사는 일군들에게 맡기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며 돈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세고 있는지도 모른다...부분 ⓒ 이충렬재래시장 경기가 활발했던 50년대와 60년대에는 사장통에서 번 돈으로 사업을 시작해 큰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은데, 그 대표적인 예가 '전설의 백할머니'다. 평양출신으로 60년대부터 80년 대 초반까지 증권가와 사채업계에서 '큰손'으로 이름을 날려 TV 연속극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 '백할머니'백희엽씨(95년 작고)는 1·4후퇴 때 맨몸으로 월남했다. 그리고는 부산 국제시장에서 억척스럽게 장사해서 종자돈을 모아 훗날 '큰 손'이 되었으니, 당시 재래시장은 서민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 상점 주인들이 부자가 되는데는 일군들의 저임금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저임금 구조가 결국에는 부산고구려$ 6,70년대의 노동자 저임금으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부익부 빈익빈'현상이 가속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부분 ⓒ 이충렬5,60년대 가게 일군들의 대부분은,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 '월급'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기술이 없던 사람들은, 오직 굶지 않아야 살아남는다는 생각으로 그런 일자리 조차 감사히 생각하며 새벽부터 밤 늦도록 일을 했다.여자들의 경우도 남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숙식을 하지 않고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경우 받는 월급이란 매우 미약하였다. 더우기 월급의 액수와 돈을 지급하는 시기가 주인 마음대로인 경우가 많아, 밀린 돈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속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전차비나 버스비를 아끼기 위하여 일을 하러 가거나 일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올 때도 웬만한 거리는 걸어가는 고달픈 삶을 살아야했다.빌리 세일러가 남긴 한국소재 작품은 위의 두작품 외에도, 어린아이, 고아원 어린이들, 초등학생들, 할머니, 할아버지 등 주로 인물모습이다. 그리고 그의 한국 소재 작품 몇 점은 아이젠하워 당시 미대통령이 소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미술사가가 몇명만 알고 있는 화가일 뿐 아니라, 대중매체에 소개된 적이 없어, 일단 위의 두작품을 소개하고 훗날 다른 작품들도 소개하려고 한다.​(*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한겨레 2006-11-0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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