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위 행위, 성인용품 무조건 나쁘다? 자위 행위가 건강에 나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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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자위용품 여성 자위용품 ■ 경주 월지 출토 자위용품 1975년 5월 29일 안압지 출토유물 가운데 발굴조사 시 조사단을 놀라게 한 목제(木製)의 양물(陽物) 즉, 남근(男根) 모조품이 있었다. 특히 이 남근은 여성조사원에 의해서 발견이 되었다. 발굴조사가 끝난 지 40년이 가까워 오지만 아직까지도 이 남근(男根)의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아 여러 설(說)만 무성하다. 길이 17.5cm의 이 발기(勃起)된 형태의 남근(男根)은 그 크기에서 뿐만 아니라 너무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월지출토 유물 믿기 어렵지만, 기록으로 보면 신라의 역대 임금 가운데 음경(陰莖)이 가장 길었던 왕은 지증왕(智證王)인데, 한자 다섯치이었다고 하니, 40cm가 넘어 단연 챔피언이었고, 다음으로 경덕왕(景德王)인데 여덟치이었다고 하니 20cm가 넘어 지증왕(智證王) 다음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월지(月池)에서 출토된 이 남근(男根)은 17cm가 넘었으니, 이 남근을 다듬을 때 자신 스스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인지는 몰라도 신라시대 양물(陽物)로는 순위 3위인 셈이지만, 실물 모습으로 남은 것은 단연 챔피온이다. 아무튼 이 양물(陽物)이 처음 출토되고 이어서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형태의 양물(陽物)이 2점 더 출토되었다. 아직도 이 남근(男根)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누구 손에 만들어졌고, 누구의 것이 모델이었는지 또한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그 용도에 대해서만 몇몇 의견이 무성할 자위용품 뿐이다. 신앙(信仰)으로서의 성기숭배(性器崇拜) 사상의 산물이라는 견해,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놀이기구용'이라고 보는 견해 등이 바로 그 것이다. 월지출토 유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윤근일의 회고 “최규하 총리를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가 현장에 와서 목제(木製) 남근을 만져보고 신기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다보니 최태환 당시 작업반장이 남근에 실을 살짝 묶어놓았어요. 약품 보존처리 중이던 목제 유물들에 둘러싸인 남근을 손쉽게 찾으려고 한 거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남근의 용도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학계에서는 예부터 바닷가 해신당(海神堂)에서 남근을 세워놓고 제사를 지낸 것처럼 제의용이라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고대 로마 폼페이 유적에서도 도시 곳곳에서 남근 조각과 그림들이 발견됐다. 일각에서는 월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표면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데다 돌기까지 붙어 있어 여성의 자위 기구라는 설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 만들다가 중간에 버려진 불량품 형태의 남근상 2점도 발견되었다. 윤 소장은 “남근상의 길이가 실제 발기됐을 때의 그것과 비슷하고 표면을 정성스레 다듬은 점도 예사롭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남근상이 출토된 월지는 경복궁 경회루처럼 통일신라시대 외국 사신을 접대하고 연회를 베풀던 격식 있는 공간이었다. 둘레가 1,005m, 면적은 1만5658m²에 이르는 거대한 연못이다. ■ 남근 숭배(男根 崇拜) 남근신앙(男根信仰)의 기운은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로 볼 수 자위용품 있다. 이때는 다신신앙시대(多神信仰時代)로 남근신앙은 많은 신격(神格) 중의 하나인 성신신앙(性神信仰)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울산(蔚山) 반구대(盤龜臺) 바위에 새긴 암각화(巖刻畵) 가운데 커다란 남근(男根)을 노출시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위치가 가장 높은 위치이고, 무언가 주문(呪文)을 하는 모습에 고래, 거북 등의 동물들이 줄줄이 모여드는 형상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 수렵어로인(狩獵漁撈人)들의 의식(意識)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남근(男根)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생식본능(生殖本能)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양물(陽物)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한편 기록에 보이는 남근숭배(男根崇拜) 신앙의 예는 고구려(高句麗)에 보인다. 즉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男根)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 때 이 남근(男根)을 신좌(神坐) 위에 놓는다고 한다. 남근신앙의 형태는 현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삼척 해신당(海神堂)에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실물(實物)크기로 남근을 깎아 모시는데, 이것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영혼인 해신(海神)을 위로하고 풍어(豊魚)와 다산(多産)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 신라의 성문화 그렇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男根) 역시 신앙(信仰)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이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왕자(王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이 있었던 곳이고, 한편으로는 임해전(臨海殿)이 마련되어 임금이 정사(政事)를 논하고 신하들에게 향연을 베풀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 자위용품 출토된 남근(男根)은 일단 신분이 높은 여성이거나 그들에게 속해 있던 여성들 가운데 누군가 사용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도는 무엇인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신라인들의 성생활문화는 대체적으로 개방되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古)신라시대인 4∼5세기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흙으로 적당히 빚어 만든 토우(土偶) 가운데 남녀의 성기(性器)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대체로 2∼3cm 정도이고 커보았자 10cm 미만인데, 토기항아리나 고배 뚜껑에 장식처럼 붙어있다. 이러한 토우(土偶)가 장식된 유물이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인공 역시 보통사람들의 무덤이 결코 아닌 것이다. 즉 지위가 높은 사람이거나 신분이 있는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古)신라시대 상류층의 성문화(性文化)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古)신라에서는 왕족의 근친혼(近親婚)도 행해졌고, 부인이 외간남자와 잠자리하다 발각되어도 관대하였던 것이 처용설화(處容說話)에서 보이는 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성개방(性開放) 풍조의 결과라고 여겨지고 있다. ■ 내실 자위용(內室 自慰用) 그렇다면 월지에서 출토된 남근(男根)의 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가설(假說)이고 추정(推定)일 뿐이지만 ... 앞서 말한 성행의 토우(土偶)가 6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학계는 주장한다. 즉, 신라는 당시 삼국(三國) 가운데 고급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 자위용품 데 있어 고구려나 백제보다 무려 2세기 늦은 6세기에 들어와 법흥왕(法興王)이 국가의 종교로 공인하는 데 이후 아직까지 신라토기나 출토된 유물에 앞서 말한 성기(性器)나 성행위(性行爲)의 토우(土偶)가 장식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한다. 신라는 불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토속적인 다신신앙(多神信仰)이 성행하였겠지만, 일단 불교를 받아들이고 나서는 불교 사상적인 측면에서 금욕(禁慾) 등 사회규범이 생활문화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성문화(性文化)가 형성되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마련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男根)은 분명 실용적(實用的)인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6세기를 풍미했던 '미실의 애정행각'에서 볼 수 있듯이, 고(古) 신라시대에만 해도 비교적 개방되었던 성문화(性文化)가 폐쇄적으로 변하자 엄밀히 행해지거나 아니면 자위행위(自慰行爲)로 만족을 찾아야 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이유를 더하면, 소나무를 가지고 다듬어 만든 남근(男根)에서 볼 수 있다. 즉 음경(陰莖) 부분에 옹이를 이용해서 3개의 돌기(突起)가 마련된 것이다. 단순한 성기숭배신앙(性器崇拜信仰)에서 본다면 돌기까지 마련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자위(自慰)로 최대한 만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왕녀(王女)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어느 궁녀(宮女)가 사용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어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것이다. ■ 신라 국찰(國刹) 황룡사에서 남근이? 신라시대 경주의 ‘명동’에 위치한 황룡사는 경주의 상징이기도 자위용품 했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창건됐다. 진흥왕이 새롭게 궁을 지으려던 곳에 누런 용이 나타나자 이를 기이하게 여겨 절로 만들었다. 그 100년 뒤, 선덕여왕은 재위 14년 때(서기 645년) 황룡사9층탑을 세웠다. 황룡사와 황룡사탑은 이 도시의 ‘랜드마크’였다. 한데 지난 1970년대 말 황룡사 발굴 때 출토된 유물 한 점은 지금껏 고고학계에서 ‘해석 불명’으로 남아 있다. 이 사찰 회랑 외곽에서 남근이 나온 것이다. 짙은 회색의 활석으로 만든 이 남근은 길이 8.7㎝, 귀두 최대 직경 5.3㎝로 음경 부분이 부러진 상태였지만, 사실적으로 조각됐다. 황룡사 출토 유물 함께 나온 유물이나 발굴 정황을 종합할 때 통일신라 초기(서기 7세기 말∼8세기 초) 것으로 추정됐다. 신라 제1의 사찰에서 왜 남근이 필요했을까? 성적 유희를 위해 제작했다고 보기엔 약간 크다. 물론 ‘사용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점잖은 국가 사찰에서 남근이 어떤 ‘상징성’을 띠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반면 1996년 여름, 황룡사 동편 담장 바깥쪽 배수로에서 나온 활석제 남근(서기 7세기 말∼8세기 초)은 ‘사용 흔적’이 너무나도 뚜렷했다. 당시 발굴을 했던 이은석 문화재청 학예연구관은 “이 남근도 음경이 부러진 상태로 발굴됐는데, 부러진 곳의 색깔과 손을 많이 탄 부분의 색깔이 완전히 달랐다”며 “한참 사용하다가 음경 부분이 부러지자 요즘 자위용품 말로 치면 하수구에 던져 버린 것”이라고 했다. 전체적인 비례미나 귀두의 곡선 부분, 미세한 피부 주름, 요도구(口) 등을 마치 그리스나 로마의 조각상처럼 극(極)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크기도 귀두 최대 직경 4.8㎝로 실제 크기와 거의 같았다. 남은 음경 길이는 7.9㎝였다. 자연을 모방, 혹은 복제하듯 만든 사실적 조각상이 그리 많지 않은 우리 전통으로 볼 때 지극히 이례적인 유물이었다.황룡사 출토 유물 이 남근이 나온 배수로는 경주 도심의 하수구로, 오수나 빗물이 황룡사 영역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경주 도심의 어느 여염집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 경주 안압지 발굴 때 나온 목제 남근은 자위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귀두 양쪽에 달린, 여성의 성감을 자극하는 ‘혹’ 때문이다. 손을 많이 타 반질반질하다는 것도 그렇고, 안압지가 신라시대 태자가 거주하던 동궁(東宮)으로, 시녀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점도 여기에 가세한다. 일부에서는 이 ‘혹’을 근거로 통일신라시대에도 일종의 성기확대수술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의학사적 증거는 없다. 혹 달린 남근은 서기 전 2세기 중국 한(漢)나라 제후 유승의 묘에서도 청동으로 만든 게 나온 적이 있다. 김종대 중앙대교수(민속학)는 그러나 “신라의 남근은 실제 유희용이라기보다는 아들 낳기, 혹은 풍요를 바라며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했다. 신라시대(통일신라 포함) 남근은 지금까지 자위용품 5∼6점 정도 출토됐으며, 백제나 고구려에서는 각각 한 두 점 정도 나왔다. ■ 그외 남근형(男根形)의 발견 2007년 12월 반월성 남쪽의 인용사지 발굴조사에서도 신라시대 대형 목제 남근(男根)이 출토됐다. 이 목제 유물은 한쪽 끝은 깨져 없어졌지만 잔존 길이가 30㎝에 이르며, 다른 끝은 귀두형(龜頭形)으로 깎여 있다. 귀두형과 몸통 사이에는 홈이 파여져 있어, 이곳에 끈 같은 것으로 묶어 다른 곳에 매달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인용사지 출토 유물 1800여년전 마한(馬韓)의 제사터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 논치 제사유적의 발굴보고서가 23일 발간됐다. 보고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800여 년 전에 조각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남자 성기 조각상이다. 신라 경주나 백제 부여 등에서도 삼국시대 성기 조각상이 여러 점 발굴된 바 있지만, 대부분 서기 5세기 이후의 것이었다.마한유물 백제유물토기의 손잡이 부분을 장식했던 것인데, 길이 3.7㎝, 굵기는 2㎝이다. 성기의 외(外)요도구(口)까지 표현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용도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학계에서는 풍요나 다산 등을 기원하며 땅에 묻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논치 제사유적은 국립부여박물관이 지난 99년 발굴했다. 【출처】검색종합인용, 일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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